(결말 스포일 없음)
'올빼미'라는 새의 이름을 딴 영화 제목이 매우 흥미롭다.
다른 새들이 보지 못하는 밤에 잘 볼 수 있는 올빼미와 주맹증 맹인 침술사 주인공이 나란히 병치된다.
'침술사 맹인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캄캄한 밤에 무엇을 보았는가?' 라는 무서운 질문을 미리 던지는 이 영화는 제목에서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답을 다 알고 있는데도 여전히 무서운 질문이기 때문이다.
(*주맹증 맹인: 낮에는 볼 수없으나 캄캄한 밤에는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맹인)
올빼미는 사실 맹금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른 새의 먹잇감이 되는 호락호락한 새가 아니다. 캄캄한 밤에 볼 수 있는 시력은 올빼미의 가장 큰 힘이다. 주인공 맹인 침술사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보고도 못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할 수 없는 올빼미인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가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영화 올빼미는 조선의 16대 국왕인 인조와 그 아들 소현세자를 다룬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스릴러 형식을 취했다. 이 영화를 계기로 조선왕조실록의 관련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영화 줄거리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세자빈과 함께 7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다. 소현세자와 세자빈은 청나라에서 서구문물과 변화하는 시대를 체험하고 조선도 변화해야한다는 소신을 품고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못하는 인조는 이러한 아들과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청나라의 신임을 받고 있는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두렵고 불안하다. 학질에 걸린 소현세자에게 침술 치료를 하는 어의 옆에서 보조를 하던 주맹증 맹인 침술사 경수는 마침 등불이 꺼지는 바람에 어의가 세자를 독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후 긴박하게 전개되는 상황 전개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 된다.
2. 인조는 정말 아들 소현세자를 살해하였을까? - 역사는 추리다 -
27명의 국왕이 존재했던 조선왕조에서 왕이 아들을 죽였다고 알려진 것은 두 번이다. 21대 국왕 영조와 인조의 경우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일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일이지만 인조의 경우는 다르다. 소현세자는 학질이라는 병을 얻어 엿새 만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정황은 당대에 이 일을 기록한 사관마저 죽음의 원인을 의심하고 있는 형편이다.
인조는 과연 아들을 살해하였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기록 내용이 있다. 영화 올빼미는 실록의 이 구절을 모티프로 해서 제작되었다고 영화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위의 실록 내용은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1645년) 6월 27일의 기사인데 이 날은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시행한 날이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약 두 달 만인 4월 26일 병사하였는데 졸곡제를 지내기까지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많은 추측과 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의 수상한 시신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그 출처에 대해, "당시 종실 친척인 이세완이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영화 올빼미는 소현세자 살해 장면을 목격한 침술사인 주맹증 맹인 목격자를 설정하였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목격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 정황과 사실에 기초해 추리하지 않을 수 없다.
사관이 쓴 실록의 다른 내용들을 세심히 살펴보면, 인조를 용의자로 가리키는, 적어도 세 가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사관은 앞의 소현세자 시신 기술에 앞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고 있다. “상의 행희, 소용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27일 기사)
즉 왕의 후궁, 조소용이 세자 및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왕에게 밤낮으로 모함하는 말을 했다는 당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소현세자가 죽은 지 1년이 채 못돼, 인조는 국왕 독살 시도와 저주행위를 한 역모 죄로 세자빈을 처형한다. 세자빈이 독을 넣었다는 실상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인조는 여전히 세자빈을 의심하고 반드시 법으로 처벌하고자 하여 대신들을 종용한다. “세자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였다.…이런 짓도 하는데 어떤 짓을 못하겠는가”라는 것이다. 당시 신하, 이시백, 최명길 등이 짐작만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간언하고, 아버지와 자식 간의 타고난 자애심으로 은혜와 의리를 온전하게 하시라는 건의를 올렸으나 인조는 허락하지 않는다.(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 2월 3일)
세자빈과 그의 집안은 모두 처형당하고,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12세, 8세, 4세)도 제주도로 유배당한다(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 5월 13일). 장남과 차남은 오래지않아 차례로 의심스러운 병사에 이른다.(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9월 18일, 12월 23일). 사관은 장남 석철이 죽은 사실에 대해 “앞서 용골대(청의 장수)가 왔을 적에 석철(장남)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게 된 것이다”라고 논한다.
셋째, 인조는 세자와 세자빈을 죽음에 이르게 한 중요 인물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세자를 잘못 치료하여 죽게 만든 어의 이형익과 약을 의논했던 여러 의원들도 함께 잡아다 국문하고 죄를 정하라는 양사(사헌부, 사간원)의 연이은 진언이 있었지만 인조는 어의 이형익을 옹호한다. “여러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없다”고 재차 거절한다(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4월 27일)
세자빈의 국왕 저주 옥사가 일어나자 먼저 고발한 사람은 세자빈과 가까운 관계였다는 세자빈 처소의 궁인 ‘신생’이다.
옥사가 일어나자 먼저 고발하고 대궐 안 여기저기 흉물 묻은 곳과 사람 뼈 등을 발굴하는데 협조하였다. 많은 궁인들이 사형을 받았으나 신생은 무사하였다. 정상이 흉악하고 참혹하니 ‘신생’을 엄한 형벌로 국문할 것을 양사의 신하들이 청했으나 인조는 “흉물을 수없이 많이 발굴...” 한 공로가 크다고 끝내 허락하지 않는다. (인조 48권, 인조 25년 4월 25일)
탐정은 살인사건에서 목격자가 없기에, 당시 사실과 정황에 근거하여 추리하고 범인을 밝혀낸다.
역사 역시 목격자가 없어도 범인을 밝힐 수 있다.
역사는 추리다!
(참조: 조선왕조실록 중 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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